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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결혼 기념일

얼마 전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였다. 

10번째 결혼 기념일까지는 시간이 더디 가는 듯하더니 그 이후로는 화살처럼 날아가는 세월 따라 내가 다 정신없을 정도로 숫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가고 있다.... 14번째, 15번째, 그리고 올해 16번째.

 

 

 

가족과 함께한 아침 산책

 


결혼 초기 홍콩에 머무를 때였다. 큰 아이가 아직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아기일 때 남편은 결혼기념일이라며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어느 고급 속옷 브랜드의 보라색 실크 슬립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남편은 분명 인터넷으로 ‘와이프 선물’을 검색해 보았을 테고 늦은 퇴근길에 쇼핑몰 가게로 들어가 어색한 표정으로 직원을 붙잡았을 테며 직원은 친절하게 내 나이대 여성들이 선호하는 값비싼 속옷들을 매장 테이블 위 여기저기에 펼쳐놓았을 것이다.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손에 쥐었을 때 내 눈 앞에서 이 모든 장면들이 순서대로 지나갔다.


‘내가 이런 속옷에 걸맞는 고급 옷을 입고 나갈 그런 자리가 언제쯤 다시 오려나?’
그때 어린 딸아이는 손가락을 빨며 허름한 내 추리닝 바지를 붙잡고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웃어 보였으나 남편은 이미 나의 복잡한 감정을 읽어버렸다. 나는 약간 서글펐고 남편은 아차 했을 터였다. 우리 둘 모두에게 참으로 어색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것은 결혼 기념일과 관련된 남편의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그 이후 남편은 기념일때마다 특별한 선물대신 꽃다발과 케이크를 사다준다. 올해는 굳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더니 알겠다고 하면서도 뭔가 아쉬웠나 보다. 남편은 저녁에 먹을 음식을 테이크 아웃하러 나가는 길에 장미꽃 한 다발을 사다 주었다. 꽃병에 꽂혀있는 장미꽃들을 보면서 "참 예쁘네"라며 미소짓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이 사람도 어쩔수없이 나이들어 가는구나 싶다.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스촨 중국 음식점에서 테이크아웃한 요리로 결혼기념일 저녁 식사를 하였다. 메뉴는 각자 좋아하는 것 한 가지씩 고르기로 하였다. 이번에 내가 주문한 요리는 스촨 칠리 빈 소스로 조리된 틸라피아. 처음 주문해 본 것인데 우리 입맛에는 잘 맞았다. 비싸고 양이 적어서 좀 그렇지만. 

 

 

우리 막내가 좋아하는 스촨 칠리 소스 점보 슈림프

 

 

 

남편이 좋아하는 오렌지 치킨

 

 

 

우리 첫째가 좋아하는 잘게 조각낸 매운맛 치킨

 


사실, 이날 아침 온라인 쇼핑으로 평소 눈 여겨보던 헌터 레인부츠를 큰 맘먹고 하나 질러버렸다. 연말 세일의 유혹은 생각보다 크다. 이후 남편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 조금 전에 카드 결제했어. 나에게 주는 결혼 기념 선물. 고마워.

 

남편이 선물했던 그 실크 슬립은 서랍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멋지게 차려 입을 꿈 같은 그 날은, 잠시 보류해 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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