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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봄이, 희망이, 오려나

지난 일요일부터 서머타임이 시작되었다. 시계가 한 시간 앞당겨진 것이다. 서머타임이 막 시작된 주에는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바깥 세상이 그 전보다 어둡다. 하지만 해는 금방 떠오르는지라 우리 집 첫 번째 타자인 아들아이가 스쿨버스를 타기 위해 문을 열고 나서는 7시 즈음이면 날이 제법 환해져 있다. 그렇게 하루를 지내다 보면 확실히 해가 밝고 따뜻하며 더 길어져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오후 4시 즈음이면 어둑어둑 해가 지던 그 기나긴 겨울이 물러가 버린 것이다.

주변에서는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한동안 잠잠하던 다람쥐들이 이리저리 뛰놀고 있고(그리고 땅을 다 파헤치고 있으며!) 여러 종류의 새들이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며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샌가 우리 집 앞마당에는 수선화와 히야신스의 싹이 머리를 쑥 내밀고 올라와 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나타났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봄이 오려나... 아니, 이미 봄이 왔음을 알겠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요즘 딸아이는 기분이 들떠있는 상태이다. 오후 늦게까지 세상이 환하게 밝아서 너무 좋단다.

지난 토요일 아침에는, 딸아이에게 우크라이나의 율리아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율리아나는 기존의 영어 수업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하였다. 현재는 폴란드로 피신해 있다고 한다. 부모님과 함께 피난민 쉼터에 머물고 있단다. 일단 신변은 안전한 상태이고 학교에는 못 가고 있지만 현지 봉사자들에게서 간단한 폴란드어를 배우는 중이라고 하였다. 뉴스를 통해 보여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피난 생활은 녹록지 않아 보였다. 따라서 그 아이의 상황이 어떠할지는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도 율리아나는 배움의 의지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 아이가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딸아이와 의논을 하였다. 율리아나는 당분간 정규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언젠간 학교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 아이가 원한다면 우리 아이가 영어 이외에도 수학이나 과학같은 과목을 도와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는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인가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이 상기되어 집안을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딸아... 그러려면 공부를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겠네?

이 시점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지금의 딸아이 나이였을 때 나는 뭔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명동에 있는 펜팔 사무소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온 편지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나는 내 또래 그리스 소녀로부터 온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Irene.

Irene과 나는 몇 년 동안 교류하면서 매달 편지와 사진, 선물을 주고받았다. 그 아이 덕분에 나는 평소 멀리하던 로큰롤, 락도 찾아 듣게 되었고 유럽 사람들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국경을 '쉽게' 넘나 들며 '장기간'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보내기 위해 멋스러운 경복궁 사진을 정성스럽게 찍어댔고 용돈을 모아 커다란 토끼 인형을 사서 보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사 중에 나는 그 아이로부터 온 편지와 연락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그렇게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그 아이의 이름, 필체, 사진 속 밝게 웃고 있는 얼굴이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한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 아이의 성이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 세상엔 성과 이름만 알면 웬만하면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내가 그 친구를 언급하는 이유는, 35년 전의 나는 바다 건너의 또래 친구와 낭만을 공유하였는데, 내 딸아이와 바다 건너 친구는 생사를 오가는 전쟁 때문에 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진한 내 기대와 달리, 세월이 흐를수록 꼭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 보다.

하지만 희망이란 단어는 잊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사계절이 반복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길고 긴 겨울의 어두움과 추위 속에서도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왔다. 우리 아이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 우리 어른들도 마찬가지이겠지.

이제 봄도 왔고 하니, 이참에 내가 품고 있던 작은 희망들을 쫘악 펼쳐놓고 그동안 잊고 있던 것은 없는지 체크해 볼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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