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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무대 위에서

 

 

 

2학년 여름 캠프. 몬스터를 봤다고 소리 지르며 기절하는 '키즈 6번' 딸아이.

 

 

딸아이는 2학년을 마치고 여름 방학 때 뮤지컬 캠프를 한 적이 있었다. 캠프 마지막 날 공연을 보러 갔었는데, 춤추고 노래하는 동안 아이의 얼굴은 멀리서 봐도 창백했었다. 춤과 노래를 따라 하긴 하지만 뭔가 다른 생각에 집중하는 듯 보였다. 어린 학생들 중 유일하게 딸아이한테만 대사가 있었는데, 자기 순서에 신경 쓰느라 무대 위에서 긴장을 많이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6학년 때 연극.

 

 

6학년, 그러니까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아이는 학교 연극반에 들어갔다. 뮤지컬 반도 따로 있었지만, 아이는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싫다고 하였다. 중요 배역을 맡은 7, 8학년 선배들이 앞에서 연기를 하는 동안, 6학년 아이들은 대사가 전혀 없이 백그라운드 역할만 담당하였다. 딸아이는 가장 열심히 연기를 하여 그 와중에 가장 눈에 띄는 백그라운드 캐릭터였다. 같이 연극을 하던 6학년 친구들은 딸아이에게 왜 이렇게 열심히 하냐며 베스트 연기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7학년때 연극. 당시 동영상을 캡쳐해 봤는데 화질이 별로 안 좋다. 

 

 

7학년 때 딸아이는 학교 연극반에서 아주 작은 조연을 맡았다. 한마디 대사뿐이었지만 나름 임팩트가 있는 역할이긴 했다. 아이는 자신이 맡은 장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연을 펼쳤고, 그중 한 장면에서는 관객으로부터 가장 큰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딸아이는 친구들이 주연이나 주조연으로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을 부러워하면서도 집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일부러 씩씩해 보이려고 하였는데, 사실 그런 모습이 부모 마음에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7학년이 끝나고 나는 딸아이의 여름 방학을 위해 연극 캠프를 알아보았다. 아무래도 흥이 넘치는 뮤지컬 캠프가 대부분인지라 순수 연극만 하는 캠프를 찾는 것은 쉽지가 않았는데, 다행히 좀 멀긴 했지만 연극 캠프를 운영하는 곳을 찾아내었다. 그것도 딸아이가 좋아하는 해리포터를 테마로 한 연극 캠프였다. 캠프 마지막 날, 딸아이는 호그와트 학교의 교장인 덤블도어 역할을 맡아 무대 위에서 원 없이 긴 대사를 읊어댈 수 있었다. 

 

8학년이 되자마자 나는 아이를 위해 연기 개인 레슨을 알아보았다. 대부분의 그룹 레슨들은 춤과 노래를 배우는, 뮤지컬에 기반한 수업이어서 개인 레슨을 따로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에 개인 레슨 선생님을 찾는다고 글을 올리니, 뉴욕과 저 멀리 LA에서까지 우르르 연락이 왔다. 뉴욕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꿈을 좇거나 이미 활동 중인 사람들이 부업으로 하는 개인 레슨인 듯했다. 나는 대면 수업을 원했기 때문에 모두 거절하였고, 마침 동네 근처에 공연 전문 학원이 있길래 문의하였더니 다행히도 그곳 선생님을 추천받을 수 있었다.

 

아이는 선생님으로부터 무대에서의 발성과 표현법을 배우고 있는데, 이 시간을 몹시도 좋아라 한다. 게다가 연기뿐 아니라 연극 대본 쓰는 법도 배우고 있다. 장래 희망이 작가일 만큼 글쓰기를 워낙 좋아하는지라 일석이조이기까지 하다.

 

 

 

 

연말 공연에서 모놀로그 연기 중인 딸아이

 

 

 

학원에서는 일 년에 두 차례 정기 공연을 갖는데, 학생들은 무대 위에서 그동안 갈고닦은 노래와 춤, 또는 연기를 선보인다. 공연을 보면 모두들 끼와 열정이 보통이 아닌 듯 보였다. 

 

지난 12월에 우리딸은 첫 공연을 하였다. 자기 순서가 되자 아이는 무대 위에서 모놀로그 연기를 시작하였고, 그 눈빛과 표정은 평소 내가 알고 있던 딸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 우리 딸에게서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다니... 정말 연기를 좋아하나 보다. 계속 지원해줘야겠네.

 

남편이 놀라서 한 말이다. 

 

8학년 학교 연극반에서는 나름 중요한 조연을 맡았다. 그리스 신탁녀인데 등장 횟수도 많고, 등장인물 간에 갈등을 조장하고 전쟁을 예언하는 그런 역할이다. 사실 딸아이가 원했던 건 전쟁의 신이었단다. 아쉽게도 펜데믹 때문에 연극은 무대에 오르지 못하였다. 사실 예정돼 있던 모든 학교 공연과 이벤트들이 무산되어 버렸다. 참고로 5월로 예정돼 있던 밴드부 공연에서는 딸아이가 피콜로를 독주하기로 돼 있었나 보던데, 당연히 그것도 무산되었다. 딸아이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슬프다고 하였다.

 

연기 개인 레슨은 현재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이 수업을 좋아한다. 가끔 방 안에서 혼잣말로 격하게 중얼거리곤 하는데, 가만히 엿들어보면 연극 대사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전부터 연극을 해보라고 계속 권유한 것은 나였다. 나는 어릴 때 학교와 학원에서 연극할 기회가 꽤 있었다. 내 기억에 아이들과 연극 대본을 짜고 무대 연출 및 기획하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대학교 때는 연극 동아리에도 몸담았었다. 신입생들은 무조건 연출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룰이 있어서 무대 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일 년 만에 그만둔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미국의 한 대학교에서 어학연수를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크리스마스 캐럴’ 연극 공연을 했던 때가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내가 맡은 역은 스크루지의 불쌍한 조카였다. 모두들 웃자고 시작한 가벼운 연극이었는데, 나 홀로 심각한 정극 연기를 해버린 바람에 내가 나오는 장면에선 분위기가 숙연해지곤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웃기긴 한데, 그다음 학기에 나는 본의 아니게 유명 인사가 돼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묻곤 하였다.

- 너가 그 스크루지 조카 맡았던 애지?

연극과 뮤지컬 공연을 볼 수 있는 대학로는 20대에 내가 가장 사랑하던 공간이었다. 지금도 대학로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설렌다. 반면 남편과 연애할 때 대학로에 한번 가보지 못했던 점은 지금 생각해보면 의외다. 왜 그랬을까...
나는 딸아이와 함께 내가 좋아했던 경험들을 공유하고 싶었나 보다. 나와 다른 점이 참 많은 딸아이지만 취향이든 취미든 그래도 함께 나누고 싶은 그런 것을 찾고 싶었나 보다.

중요도를 떠나 어떤 역할을 맡든 간에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서있는 딸아이를 보면 대견하다. 무대 위에 서 있는 그 순간 아이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도, 지금 이 순간을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이 엄마의 마음이며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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