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작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참혹한 전쟁, 지독한 가난과 편견, 폭력으로 점철된 그런 모진 세상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이 가족을 이루었다. 생전 제사는 형식일 뿐이라며 반대하였지만 그녀의 후손들은 10주기 제사를 그들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치르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여성의 발자취를 쫒아 이들은 하와이로 향한다.
책의 첫 장에는 심시선 여사의 가계도가 나온다. 결혼을 두 번 하였고 다른 성씨로 이루어진 가족들이 심시선 여사를 중심으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혼한 자식들에겐 아들 딸들이 있으니 그녀로부터 삼대가 이어진 가계도이다. 그 가계도에서 심시선이란 여성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읽힌다. 또 한편으로는 가계도가 책의 가장 앞장에 있음으로써 나처럼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독자에게는 세심한 배려가 되겠다.
아들 딸들, 그리고 손주들은 심시선 여사를 추억하기 위해 그녀가 좋아했을 것 같은 가장 멋진 추억, 경험들을 하와이에서 각자 찾아내어 공유하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며 생의 의미를 찾아간다. 시대에 순종적이지 않고 올곧았던, 그래서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그랬기에 특별했던 예술가 심시선 여사의 후손들답게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자 다짐한다.
이 소설 속에는 남성들도 등장하지만 상당히 제한된 역할로만 나올 뿐 그다지 큰 인상을 남기지를 못한다. 아마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라서 일 것이다. 그것도 악착같이 살아나가는 기세 등등한 여성들 말이다. 가모장제의 느낌인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나는 딸만 있는 집에서 사랑받고 자랐고, 내가 받은 교육 환경이나 직장 내 분위기는 개인의 능력이 우선이었지 성차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페미니즘, 성차별과 관련된 제도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해 보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다 보니 내 또래 여성들이 겪는 고민과 고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사실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내 윗 세대의 여성들보다 우리 세대가 그래도 조금은 낫듯이, 우리 세대보다는 내 자식의 세대는 훨씬 더 나을 것이라 믿고 싶다. 내가 느끼는 이 세계의 부당함을 내 딸아이는 느끼지 않기를, 아니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으니, 그나마 조금 덜 느끼게 되기를...
만약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가를 이루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고 싶었다. 쉽지 않았을 해피엔딩을 말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이와 같이 밝혔다. 소설가가 가진 특권이라 생각되어 멋진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과거에 스치듯 지나간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교 때 나는 친한 선후배들과 함께 북한산에 올라간 적이 있다.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았던 후배 한 명이 근처에 할머니 집이 있으니 잠시 들려 저녁이나 먹고 가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 동네는 대저택이 많은 걸로 유명한 곳이었다. 당시에는 핸드폰이라는 것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이니 연락도 없이 일단 찾아갔었던 것 같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할머님의 집은 오래되었지만 꽤나 컸고 정원도 매우 넓었던 것 같다. 할머님은 마침 외출 중이셔서 직접 뵙지는 못하였고, 우리는 어떤 분에 의해 바로 주방으로 안내되어 갔었다. 후배와 대화하는 것으로 보아 집에서 일을 도와주시는 분인 듯했다. 그곳에는 서너 분의 아주머님들이 음식 재료를 손질하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한 스무 명은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 구석에 앉아 우리는 아주머님들이 차려주시는 음식을 매우 감사히 그리고 조심스러워하며 먹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서둘러 차려주신 저녁이었지만 된장찌개며 담백한 나물 반찬이 맛깔스러웠던 그런 상차림으로 기억한다. 크고 튼튼해 보이는 고가구들도 인상적이었고, 오랜 때가 묻어 있는 구식 주방의 모습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후배와 아주머님들의 대화를 들으며 유추해보건대, 아마도 할머님은 평소에도 지인들을 저녁 식사자리에 자주 초대하시는 것 같았다.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손님들일까? 이 커다란 식탁에서는 어떤 대화들이 오가는 것일까? 예술에 대한 이야기? 교육에 대한 이야기? 정치나 철학에 대한 이야기? 할머님은 어떤 분이실까? 해방 전에 태어나셔서 한국전도 겪으셨을 테고 그 당시에 여성으로서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라셨을까? 어쨌든 일반적인 할머님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그 집을 나섰다.
졸업과 동시에 그 후배와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기에 여전히 할머님의 본모습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 시대를 앞서 나간 분이었을 것 같은 생각은 든다. 넉넉한 이미지의 여장부였을 것 같기도 하다. 한 소설가의 상상 속 인물이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일부 기억의 흔적만으로 누군가의 모습을 그려나가는 시간도 나에겐 나름 흥미로웠다.
이 소설의 제목에는 마침표 대신 쉼표가 붙는다. 무슨 의미일까 싶어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계속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절망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 쭉 나아가는 것에 주목하자는 뜻을 담고 싶었단다. 나 역시 젊은 소설가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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