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겨울방학을 마친 딸아이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주변에 같은 나이의 자녀를 키우는 한국 엄마들을 만나보면 약속이나 한 듯, ‘애들 방학이 왜 이렇게 기냐’, ’ 밥 해주기 힘들어 죽겠다’며 아우성이었다. 나도 ‘맞아 맞아’하며 맞장구를 쳤었다. 아무래도 방학 내내 딸아이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요리하게 되고, 또 반대로 아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들은 거의 안 하게 된다. 남편의 경우는 평소 잘하지 않는 외식을 한다며 딸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어이없지만 아이의 비위를 맞추느라 눈치 보는 내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정녕 네가 우리 집 상전이로구나!‘.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우리 집 상전으로 자랐으니 뭐 할 말은 없다. 이런 걸 내리사랑이라고 하나보다.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이, 첫째라 그런가 내가 나이 들면 딸아이에게 많이 의지하겠구나 싶어진다.
딸아이가 방학이라고 집에 막 도착했을 때 나는 브라우니를 만들고 있었다. 아들아이의 학교 클럽에서 기금 마련을 위한 베이크 세일을 할 예정이었는데, 아이가 판매할 브라우니를 집에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븐에 문제가 생겼는지 브라우니가 잘 안 만들어졌다. 처음엔 흥얼거리며 기분 좋게 시작하였는데 자꾸 문제가 생기니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씩씩거렸다. 딸아이는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팟락 파티를 하거나 베이크 세일을 할 때면 혼자 알아서 쿠키나 케이크, 브라우니를 만들어 갔었다. 내가 신경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던지라 이제 와서 이런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괜스레 짜증이 올라왔던 것이었다.
짐정리를 마치고 부엌으로 내려온 딸아이가 이 모습을 보더니, ”엄마만 괜찮으면 이 브라우니 내가 만들어볼게. “라며 팔을 걷어붙였다. 어찌어찌 대안을 생각해 내고 이런저런 시도 끝에 딸아이는 브라우니를 완성해 내었다. 동생에게 포장한 브라우니를 넘겨주면서 나에게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엄마, OO도 이제 이런 건 혼자 알아서 해야 하지 않아?"
그저 웃음만 나왔다. 내가 바보스러웠고 딸아이가 든든하였다. 나의 헛발질, 딸아이가 그것을 수습하는 일, 그런 것들이 조만간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딸아이와 둘만의 데이트도 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 자르고 난 다음에 아이가 좋아하는 짬뽕을 먹으러 갔다. 올해 초에 H mart에 푸드 코트가 새로 오픈했는데, 이곳에 백종원의 홍콩반점도 입점해 있다. 보스턴 시내에서 먹어 본 짬뽕은 2프로 부족하여 뭔가 아쉬웠는데, 새로 생긴 홍콩 반점의 짬뽕맛은 꽤 괜찮다. 적어도 짬뽕 하나 때문에 한국에 대한 향수병은 걸리지 않을 듯하다.


방학 중에 아이 학교에서 인턴쉽 페어가 있었다. 딸아이는 아직 1학년인지라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지만 미리 알아보고 싶다며 학기 중에도 이런 자리가 생길 때마다 열심히 참석을 해왔다. 사진 속 참석자들의 표정을 보면 다들 진지한 모습들이다. 한국뿐 아니라 여기 미국 젊은이들도 좋은 일자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회 초년생의 나의 모습은 어땠는지, 새삼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겁 없고 의욕 넘치던 20대의 나였는데. 그것도 한때구나 싶다.
대학에 들어오면 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딸아이에게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었다. 아이도 그리 생각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나름 잘해오고 있다. 기특하다. 그래 앞으로도 이렇게만 가자.

딸아이는 옆집 그레이스 엄마의 홈메이드 스프링롤을 매우 좋아한다. 고맙게도 매년 구정이면 방금 만든 따끈하고 바삭한 스프링롤을 우리에게 갖다 주는데, 올해는 구정 바로 전날 아이가 기숙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달력을 본 아이가 아줌마한테 미리 스프링롤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본다는 것을 내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이를 알 리 없는 그레이스 엄마는 이번에도 구정에
맞춰 스프링롤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딸아이에게 스프링롤 사진을 찍어 보내면서 다음에 올 때까지 냉동해 놓겠다고 하였다. 아이는 무척이나 아쉬워하였다. 음식은 하자마자 바로 먹어야 제 맛인데 말이다.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려워 보이진 않아서 그레이스 엄마 Lei에게 레시피라도 받아놓을까 싶다가도, Lei 만의 특제 스프링롤로 남겨놓는 게 낫겠다 생각되었다. 다행히 옆집 딸 그레이스는 나의 김치전과 양념치킨을 좋아해 주니 나중에 시간 날 때 만들어 주어야겠다. 이웃끼리 정을 나누는 기회를 이렇게 늘려가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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